공부기록

제1장 20세기 초 서양 세계 본문

정리 리딩/세계화 시대의 서양 현대사

제1장 20세기 초 서양 세계

be-Seen 2024. 11. 28. 11:43

1. 장밋빛 미래에서 절망의 세기로

"1990년을 맞이하는 서양 사람들은 이들보다 1세기 후에 살았던 사람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었다." "오랫동안 총성이 들리지 않았고,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삶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가 더욱 진보하리라는 믿음을 자연스레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두 차례에 걸친 대전으로 사람들은 더욱 비관론에 젖어들게 되었고, 홀로코스트 등 인종 전쟁과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으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이 파국은 사실 19세기 후반에 거세진 식민지 쟁탈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놓고 서로 갈등을 빚었지만 가급적 총을 감춘 채 평화를 연출하여 겉으로는 진보와 화합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들이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은 오히려 야만이었다." 

"서양 현대사의 시작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위기를 맞고 이에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는 시점, 곧 세계적 충돌의 씨앗이 뿌려진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일어난 변화는 근본적으로 19세기에 성립한 두 가지 현상 -하나는 국내적인 것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것으로 식민지 쟁탈전-이 위기를 맞이하면서 비롯되었다.
국내 :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에서 정치권의 주역으로 나선 부르주아지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 부르주아지는 국내외의 여러 측면에서 위기를 맞았다." "귀족과 노동계급이 양쪽에서 벌이는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귀족은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노동계급과 사회주의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민족주의는 점차 공격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여성과 소수집단의 갈등까지 이에 가세하면서 부르주아지 사회는 각종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미 유럽의 중심부는 식민지 쟁탈전으로 조화와 화해가 아닌 배제와 파괴의 논리에 젖어 있었다."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식민지 정복의 논리는" "다시 중심부로 돌아와 유럽의 심장을 겨누었다." "국내에서도 이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사용했던 논법, 곧 중심과 주변, 지배와 복종, 근대와 전통, 우수성과 열등성의 이분법에 익숙해졌다." 

국제 : 식민지 쟁탈전

"국내에서는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 사회에 심각한 도전을 해왔다. 처음에는 이 국내외의 위기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점차 하나의 위기로 귀결되었다."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심을 국외로 돌리게 되면서 식민지를 둘러싼 충돌의 위험성은 커졌고, " "식민지 쟁탈전을 거치며 경험한 야만적 해결책이 다시 국내에 이식됨으로써, 두 위기는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초에 나타났던 전쟁, 혁명, 대공황의 전조는 국내 위기의 심화와 해외 식민지 갈등이 서로 결합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국내의 위기와 해외의 식민지 쟁탈전은 서로의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급기야 전 지구 차원의 파국으로 번졌다." 

 

"이처럼 20세기 초기는 서구 유럽과 그 밖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서구는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국내에 서로 대립하는 두 사회를 만들어냈고, 이어 식민지 정복을 통해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를 만들어냈다." 

 

2. 세계화 시대의 개막

이 '세계화'는 지리적 정복이주, 그리고 경제적 통합으로 시작되었다
지리적 정복

"지구는 지리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었다." "아프리카 탐험에 이어, 1909년과 1911년에 북극과 남북이 각각 차례로 정복됨[각주:1]으로써 지구는 그야말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1900년의 시점에서 보면 수에즈 운하가 완성된 지 이미 30년이 흘렀고, 1904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공사가 개시될 참이었다." 

"지리적 환경의 변화만이 '20세기 초의 세계화'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세계화의 양상은 우선 인구 증가의 결과였다." "1900년 지구의 인구는 약 16억 3000만 명으로 추산"되고 "1800년에는 약 9억 5000만 명"이었다. "가장 인구가 많은 대륙은 아시아였지만, 19세기 줄곧 가장 빠른 인구 증가를 보인 곳은 아메리카였다." "이러한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는 산업혁명과 공증위생의 개선으로 가능했다."

 

이주

"인구 증가와 더불어 인적 교류의 확대가 세계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세계가 좁아지면서 여행객도 늘어났다." "1879년 한 해에 스위스를 관광한 사람은 이미 100만 명에 육박했고, 그 가운데 약 20만 명이 미국인이었다." 

"사회적 여건도 세계화를 부추길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다." "표준시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14세기 시계가 발명된 이래 세계는 고사하고 한 나라 안에서도 단일하고 공적인 시간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급속도로 발전한 철도에서 표준시의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요구 때문에 미국의 철도회사는 1883년 표준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어 1884년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이제 전 세계가 동일한 시간 축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통합

"이 시기에 총자본에서 국제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마 20세기 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 세계화의 첨병은 물론 다국적 기업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다국적 기업이 등장한 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이다." "운송과 매체의 혁명에 힘입어 무역, 금융, 기술, 제조업을 하나로 통합했으며, 특히 초기에는 석유와 석탄, 철강 등을 주요 사업 분야로 삼았지만, 이후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미국 싱어 사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유럽 시장을 개척"했다. 

"하지만 이 시기가 1870년대부터 1896년까지 계속된 경제적 대 불황기[각주:2]를 겪고 난 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 겪은 심각한 경제 불황의 여파로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정치적 민족주의가 고조됨과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 보호무역주의가 시대적 조류로 자리 잡았다." 

 

3. 제국과 식민

아프리카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분할은 유럽 세계가 어떻게 팽창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기(1837~1901)에 해마다 영토를 거의 본토와 맞먹는 넓이만큼씩 확장해 갔다." "확보한 수에즈 운하[각주:3]를 정점으로 영국은 1882년 이집트를 비롯한 나일강 주변 지역을 확보했고, 이어 남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집트와 남아프리카를 잇는 이른바 '종단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1881년 튀니지를 점령함으로써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아프리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1902년 보어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과정은 계속되었고, 이때 생긴 국경선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곳이 많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분할을 마무리한 유럽 각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했다." "물론 이 지역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오래전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이 식민지 확보에 대한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은 더욱 거세졌다." "실론(스리랑카), 말레이 반도, 홍콩을 확보한 영국에 이어서, 프랑스는 1887년 인도차이나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독일은 사모아 지역 등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식민지 획득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군인, 상인, 제조업자, 금융가 등 이른바 부르주아지였다." "이들은 경제적 이익과 함께 사회적 명예도 얻었다." "이들 집단이 전 세계를 누비며 얻은 풍부한 경험과 진보는 경제적 이익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중요했다." "그에 비판적인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제국주의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여론도 생겨났다." "영국 납세자들이 제국주의에 돈을 대고 영국 군인들이 제국주의를 위해 싸웠지만, 이익을 얻는 것은 소수의 특권적 부자 엘리트들, 즉 로즈나 로스차일드[각주:4]와 같은 자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힐퍼딩,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등 사회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독점 자본주의'가 식민주의를 만들어낸다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시기의 식민지 팽창이 제국 내의 모든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그것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거나 가끔은 사람들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제적 이득이나 정치적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영광을 드높인다는 선전과 선동을 통해 가능했다."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날로 긴장되어 가던 국내의 사회적 문제는 이제 막 성립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지 사회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세실 로즈를 비롯한 많은 제국주의자는 내란을 피하고자 한다면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 "식민지 쟁탈이야말로 그 유일한 대안이었을 수도 있었다." 

 

제국의 통치 기반

"제국의 통치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유럽 제국들은 소규모 군대와 관료 집단을 통해 광활한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물론 19세기 산업과 기술의 발전 -철도와 전신, 전함과 기관총-이 엄청난 도움과 이점을 제공했지만, 많은 토착 현지인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토착민들로 이뤄진 인도군은" "전체 영제국의 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본국과 현지가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제국 군대에서 복무함으로써 돌아올 이득을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을 최대한 누렸다." "강제만큼이나 협조도 식민통치에 긴요했다." 

"제국의 팽창이 국내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나 사회적 불만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출구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 "결국 본국 정치의 야만화를 가속시킨 측면도 있다." "보어 전쟁을 지켜본 처칠도 영국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고 이상하고 끔찍한 광경만 남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종 학살의 징후도 이 시기에 이미 등장했다." "보어 전쟁[각주:5]에서 영국은 보어인들을 영국에 있는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총 2만 7927명(전체 보어인의 14.5퍼센트)이 영국에서 사망했다."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이처럼 초토화 작전과 수용소가 결합된 결과였다."

"독일의 경험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독일령 서남아프리카(나미비아)를 통치하면서" "나치 시대 유행했던 생활공간과 수용소"가 생겨났다.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독일 병사들은 이들을 물리쳤고, 결국 '반항하는 종족을 절멸시키고자'하는 독일군 장군 폰 트로타의 의지대로 4만에서 7만에 이르는 헤레로족이 몰살당했다." "1907년까지 1만 명이 넘는 나마족을 학살했다." 

 

보어전쟁

"식민지의 상품이 대대적으로 모국으로 수입되면서 식민지 문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생겨"나기도 했다. "폴 고갱은 1891년 타이티로 건너가 그 지역의 문화와 풍경을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혼용 문화 혹은 다문화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폴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4. 부르주아지 사회의 위기

"부르주아지가 정치권의 주역으로 나선 계기가 되었던 프랑스혁명[각주:6] 은 1889년에 이미 100주년을 맞이했다." "부르주아지가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산업혁명의 총아였던 박람회와 더불어 자축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통적 지주계급은 19세기말까지도 가장 힘 있는 지배계급의 하나로 군림했"다. "19세기말의 농업 위기는 지주들의 경제력과 자신감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고, 이들은 드디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과 더불어 사회의 주도적 세력을 형성했던 부르주아지-금융인, 공장주, 상인, 전문직 종사자-는 수적으로 확대되고 출신도 다양해졌지만, 단일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

"자본주의의 진전이 속도를 더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체성이 강화되었다. 수적으로 증가한 노동자들은 자본의 힘에 맞서 산업과 정치에서 그들의 조직을 강화하고 투쟁을 확대해 갔다." "노동조합의 외형적 증대와 조직상의 성숙, 그리고 노동자 정당의 출현과 확산이 줄을 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여러 조류-마르크수주의, 사회민주주의, 프루동주의, 페이비언주의, 생디칼리슴 등-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야말로 부르주아지 체제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후발국인 독일과 러시아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외에 이렇다 할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 "미국에서는 사회주의가 거의 발 붙이지 못했다." "대신 미국과 서유럽 등지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00년까지 사회주의 운동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1880년대 이후 수많은 사회주의 분파가 난립했으나 차츰 통합이 이루어져 1905년에 통합사회당을 결성했다." "독일에서는 독일사회민주당이 1875년 통합을 거쳐 비스마르크 치하에서는 탄압을 받았으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면서 조직정당으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어 "1912년 제1정당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도 점차 분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19세기말에 불어닥친 정치적 변화의 하나는 바로 민족주의이다." "자유주의와 함께 19세기 주요한 정치적 이념으로서 자리를 잡았던 민족주의는 이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족국가의 성립으로만 본다면 민족주의는 오히려 19세기 중반까지가 절정이었다." "뒤늦게 민족국가를 수립한 나라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민으로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했고, 이 열풍은 다시 다른 나라를 위협하여 경쟁을 자극했다." "민족은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고 많은 숭배자를 거느렸다." "국가는 민족적 혹은 국민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박물관을 짓고, 역사를 새로 쓰고, 전통을 '창안'하려 했다." "또 새로운 세대의 주역이 될 어린이들에게 공교육을 통해 자국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주입했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지방의 방언이나 문화는 과감히 무시되거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방과 마찬가지로 소수집단도 민족주의 열풍의 희생물이었다." "정치적 우파가 민족주의 깃발을 치켜들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우파의 민족주의는 점차 국수주의적 모습을 띠거나 외국인이나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감으로 변색되었다." 

"19세기말 프랑스 제3공화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드레퓌스 사건[각주:7]이야말로 인종주의와 이민, 그리고 소수집단이 어떠한 정치를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에밀 졸라가" "공개서한을 통해 그를 변호하면서 결국 프랑스 제3공화정 사회는 두 편으로 갈라졌다." 

여성

"사회에 대한 도전은 노동자들한테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가 추구한 가족의 이상은 매우 이율배반적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가족의 구조와 이것을 떠받치는 가치가 부르주아가 공적 영역에서 추구하던 것[각주:8]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의 계급적 특성과 관련하여 일어난 변화로써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여성'과 여권운동의 대두였다." "사무직 고용의 확대로 인한 여성 취업의 확대, 피임법의 개발과 적용은 중간 계급 여성이 주도한 여권운동의 등장과 확산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여성이 직업을 갖기 시작했으며, 여성운동의 선각자들이 등장하여 여성운동의 싹을 틔웠다." "이즈음 여성은 신문을 읽고 운동을 즐기고 학교에 다니는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도운 것은 아무래도 여성직업이라고 부를 만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부터이다." "상점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야말로 대표적인 여성 직업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것이 여성의 권리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5.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화

과학기술

"1900년에 열린 파리박람회에서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알리는 많은 신제품이 전시되었다." "20세기 초 과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물리학은 갈릴레이와 뉴턴 이후 물리학계를 지배해 온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상대적이고 직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이 여전히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세계를 단순히 재현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선험적 내용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영국의 톰슨은 전류가 전자라는 알갱이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을 발표하여 고전물리학의 토대에 의문을 제기했고, 1905년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원리를 만듦으로써 플랑크의 이론을 입증하고 현대 물리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과학혁명은 우주와 세계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고, 복잡한 현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또 하나의 과학적 발전은 생물학에서 이루어졌다." "우생학은 진보와 개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우생학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다른 한편으로 서양 문명의 쇠퇴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문화

"전통적인 '고급문화'는 '저급한' 대중문화의 도전을 받았으며, 일부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문화를 부정하고 대중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대중문화의 탄생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영화와 광고의 등장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매체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매체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전통적인 방식을 부정하는 형태로 드러났다. 그래서 새로운 전위예술운동이 탄생했다." "아방가르드, 아르누보, 유겐트스틸 등으로 나타나, 1910년 이후 구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했다." 

"각종 문화현상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세기말과 데카당스로 표현되는 시대적 징후가 이를 선도했다." "문학에서는 데카당스[각주:9]와 타락이 시대의 주요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노르다우는 1895년 발표한 <타락>에서 인류가 퇴폐에 탐닉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경고했다." 니체와 같은 부르주아들은 "대중교육을 통해 문화가 민주화됨으로써 중, 하층계층이 수적인 성장을 앞세워 문화적으로 침투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시기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점차 국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샤갈 등은" 파리에서 유명했지만 외국인이었다." "대중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오락,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오락이 국제적인 혁신을 이루기도 했다." 

6. 흔들리는 평화

"유럽에는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두 전쟁인 보어 전쟁과 러일 전쟁은 유럽 밖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1914년 8월처럼 그렇게 전쟁에 열광하리라고 또 강대국 사이에서 곧 전쟁이 발생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평화운동과 반전운동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여 평화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론이 널리 퍼졌다."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의 우려가 있을 때마다 반전시위를 벌이고 성명서를 발표하여, 만약 부르주아지들이 전쟁을 벌이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부르주아지 진영에서도 평화운동이 일어났고, 노벨평화상이 제정되었으며,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같은 항구적 평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도 이어졌다." 

"평화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으로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에 둔감해졌다." "또 평화의 이름으로 군비경쟁이 지속되었다." "영국과 독일 사이의 건함 전쟁에서도 양쪽 모두 그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일전쟁과 러시아혁명, 모로코 사건[각주:10], 2년 후에 발생한 터키 혁명, 1911년 모로코 위기가 큰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낙관주의도 덩달아 커졌다." 

"실제로 당시 전쟁은 유럽 밖 머나먼 식민지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잊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 스스로 이 유럽 밖에서 일어난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사회 전체가 전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회가 점차 식민지에서 일어난 전쟁의 폭력에 노출되면서, 강하고 영웅적이며 힘센 남성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숭상되었고, 전쟁소설 등으로 전쟁의 경험이 자극되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군사조직과 징병제가 등장했다." 

 

  1. 1909년 로버트 피어리 (미국) 북극 정복, 1911년 로알 아문센 (노르웨이) 남극 정복 [본문으로]
  2. 오스트리아 빈 증권거래소의 붕괴와 미국의 철도회사 파산이 세계 금융 시장에 충격을 주며 국제적인 경제 불황을 초래. 이후 산업혁명으로 늘어난 생산량을 소비 시장이 감당하지 못했고 곡물과 상품 가격의 급락. 기업 간 합병과 대규모 독점 기업, 카르텔이 형성되는 등 산업 구조의 재편을 초래. [본문으로]
  3. 홍해와 나일강을 잇는, 유럽과 아시아의 연결 운하. 영국은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식민지와의 연결에 이 운하가 필수적이라고 여겼음. 이집트의 심각한 재정난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지분을 매입했고, 이후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함. 수에즈 운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생명선의 기능을 했음.  [본문으로]
  4. 세실 로즈. 금광 채굴한 제국주의 사업가. 로스차일드는 그의 뒤에서 로즈가 일군 회사로, 전 세계 다이아몬드 사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한 데베르스의 대주주.  [본문으로]
  5.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후손들인 보어인들과 영국인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 이때 사용된 게릴라 전술이 20세기 전쟁이 영향을 미침. [본문으로]
  6. 루이 16세의 절대왕정과 봉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이 확산되며 세계 민주주의에 기여한 18세기 후반 혁명. [본문으로]
  7. 1894년 유대인이며 프랑스 장교였던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비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배지에 감금되었으나, 실제로 누명을 쓴 것으로 판명된 일. [본문으로]
  8. 가부장적 독재와 계서적 질서 제거 [본문으로]
  9. 아름다움의 극단적 탐구, 쾌락주의, 비관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의 경향. 대표적으로 조리스-카를위스망스의 《거꾸로》(À rebours). [본문으로]
  10. 영불협상으로 영국이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 권리를 묵인하고, 독일은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 이로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삼국 협상이 강화되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