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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부정과 상승

비극, 하마르티아, 스카페이스

be-Seen 2024. 7. 30. 01:51
비극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는 이야기로서, 관객은 주인공의 행동과 비극적 결과를 통해 공포와 연민을 느끼고, 주인공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할 교훈을 받게 된다.

“비극은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비극의 목적도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성질은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데, 행복과 불행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학)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반전(peripeteia)과 발견(anagnorisis)을 가져야 한다. 그것들이 필연성에 의해 개연적으로 플롯이 전개되어야 한다.

 

비극을 한 줄로 정리하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 또는 우리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명망과 번영을 누리다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로 인해 추락하는 이야기

이다.

 

<시학>에서 말하는 좋은 비극의 네 가지 조건.

(1) 그것은 하나의 단일 이슈에 집중하여야 한다.

(2) 주인공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져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3) 불행은 주인공의 도덕적 성품에서가 아닌 ‘하마르티아’로부터 와야 한다.

(4) 주인공은 오이디푸스나 오레스테스처럼 적어도 보통 사람보다도 나은 신분의 소유자이어야 한다.

⇒ 비극의 목적인 연민과 두려움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무대장치나 대사가 아닌 플롯 그 자체로부터 오게 될 때 그 비극은 훌륭한 비극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좋은 비극이란, 훌륭한 플롯을 가져야 하며, 훌륭한 플롯은 관객에게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인공의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운명을 예기치 않게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반전(peripeteia)이나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가 갑자기 알게 되는 깨달음(anagnorisis)이 있을 때, 비극은 공포나 연민을 일으키고 결말에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마르티아hamartia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마르티아’를 단순히 주인공의 지성적 혹은 도덕적 무지나 착각, 과실만을 뜻하는 것으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유한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이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하더라도 결국 벗어날 수 없음으로 인해 비극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적 실존성’(有限的 實存性)을 지칭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실존성은, 한편으로 ‘하마르티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마르티아’의 지배 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안티고네를 생각하면 이해가 한편 쉬워 보인다. 운명moira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해 처벌받는 이야기. 

 

'하마르티아'의 사전적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널리 쓰이던 말이어서 그랬는지 ‘하마르티아’의 정확한 정의를 하고 있지 않기에 ‘하마르티아’는 여러 갈래로 번역이 되는데, ‘무지’ 혹은 ‘판단 착오나 실수’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우리와 비슷했던 인물이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로 인해 몰락하는 이야기가 비극이다.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는 부모를 잘못 알고 있었던, 즉 무지로 인한 실수이다.

 

학자들은 <시학>에서 사용되는 ‘하마르티아’를 비극을 비극되게 하는 훌륭한 플롯의 결정적 요인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지칭한다. 주인공의 불행을 결정짓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오셀로>, <햄릿>, <맥베스>에서 주인공은 ‘하마르티아’를 통해 반전(peripeteia)과 인지(anagnorisis)를 갖게 되고, 그 결과 운명이 바뀌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진다. 관객은 두려움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시학>에서도 비극에서 관객이 느끼는 정서를 드러낸다.(“공포와 애련을 환기시키지 않아서는 안된다.”)

우리와 유사한 주인공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애련과 공포를 느끼고 이야기가 개연적으로 완결되었다는 인상을 주며 매듭을 짓게 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정서적 위안으로 자신에게는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안도하며 느끼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에게 ‘반전’과 ‘발견’을 가져와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바로 이 때문에 관객은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그 비극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스카페이스

<스카페이스>는 주인공 '토니 카몬테'가 조직의 보스까지 오르는 상승곡선을 이루다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로 인해 추락하는 이야기로 전형적 비극 구조를 따른다. 

<스카페이스>에서의 '하마르티아'는 즉,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는 여동생 '체스카'의 남편이자 자신의 동료인 '귀도 리날도'를 살해하는 행동이다. 토니는 귀도와 체스카가 결혼한 사실을 몰랐고 이후 여동생의 눈물로 '인지(anagnorisis)'를 갖게 된다. 그 후 경찰이 토니의 살해 증거를 찾아 그의 운명이 바뀌고 여동생과 자신의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불행으로 떨어진다. 

 

토니 인지(anagnorisis)의 순간
공포의 순간
애련, 연민의 순간
카타르시스 마무리

 

 

 

 

참고문헌) 김인숙(2017),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타난 ‘하마르티아’에 대한 연구", 문화산업연구 제17권 제2호(2017년 6월), 129~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