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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슬리, <미학사> 제 1장 최초의 사상들 본문
제1장 최초의 사상들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언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미학의 출현에 앞선 단계들을 일별해 볼 수는 있다. 어떤 것, 곧 예술 작품이나 그것을 창출하는 활동은 막연하긴 하겠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과 구별되었을 것이다. 총칭적인 예술 개념은 보다 늦게 생겨났다. 그러나 예컨대 이야기나 노래, 춤 따위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질이나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부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 예술의 탄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곧 적어도 이따금씩은 예술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야기되거나 서술되고 판단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때 철학적으로 반성적인 사람은 흥미있는 관심거리에 대하여 돌이켜 생각해 보고서 일련의 현상이 근본적으로 골칫거리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일반성과 일관성으로 해서 비로소 철학적으로 될 것을 요구하는 명제들(이것들은 작품 그 자체와 작품과 관련된 다른 명제들 모두를 포함한다)을 엮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 예술, 위에서 말한 노래, 춤 등은 '이야기되고 서술되고 판단'된다. 철학적으로 다른 대상들도 '이야기되고 서술되고 판단'될 것인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된다.
물론 한 특정 문화에서 미학이 출현하기 전에는 어떤 대상이 그 문화에 의해서 특별한 미학적 대상으로 -오로지 그러한 관심과 관계된 것으로- 분류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몇몇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서는 미적인 관심이 어느정도 주어졌던 것 같다. 이때의 예술철학은 아주 일찍부터 그러한 관심의 본질,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만이 이렇게 특유한 방식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되느냐 하는 물음을 품고 해명하기 위한 시도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 아마도 미적 대상에 대한 뚜렷한 분류 의식이 없는 사람 혹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방식으로 미적 관심이 주어졌을 것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구분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아마 여기서 '가치 있다'는 '아름답다'로 치환될 가능성이 보인다.
미적인 것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의식이 적어도 철학적 반성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명료성에 도달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사실 탁월한 권위자인 스미스 교수는 이 점을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예술에 대한 미적 태도를 가졌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라고 보고 있다. "모든 증거를 통해서 볼 때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예술적 창조물들의 미적 매력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인들의 조각과 벽면 부조들이 지닌 종교적, 추상적 특질에 쉽게 감명받을 수 있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우리와 같이 그것들에 반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미스 교수는 몇 가지 흥미 있는 논의를 제공했다.
: 수업시간에 다룬 '피라미드' 예시를 생각해보자. 노동자들은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예술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미적 태도를 갖지 않은 것이다.
비록 이집트인들이 훌륭한 솜씨나 꽃들을 감상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조각과 그림은 보는 사람이 편리하도록 배치되지 않았으며 그 대부분은 무덤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건축가의 직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이들 대가들이 이룩한 수만 개에 이르는 명각에서 상찬되고 있는 것은 그들 작품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금속의 강인함과 영구성, 풍부함과 넉넉함이다.
: 예술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지는 감상자가 배제되어 있다. 또 아름다움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고 본 거 같다.
섬세한 양각으로 뒤덮인 건축물들의 거대한 기둥은 이 두 가지 특징들을 결합시키는 데 있어서의 미학적 어려움에 대해 이집트인들이 무관심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다만 그것은 왕의 재산과 그의 신과의 관계를 영영토록 기록해두기 위해서 규모와 크기를 영속적으로 보존하려는 과도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스미스는 말하기를, "그들이 nefer라는 낱말이나 'n과 같은 다른 낱말을 형용사로 사용할 때에 그것은 'good', 'fine' 또는 'beautiful'로 번역이 되는데, 여기에서 한 사물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이집트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분명해진다. ... 보통 건축에 적용될 때에 그것은 재료의 특질과 작업의 완벽성에 적용된 것으로서의 'fine'의 의미를 지닌다.
: 이집트인들에게 아름답다는 것에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보통 usually'이란 말에 어느 정도 주의해야겠으나, 그 문명의 일반적 성향으로 볼 때 그것은 충분히 명백하게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예술에 대한 그러한 반응을 종교적, 정치적 태도와 구별했던 것 같지 않으며, 따라서 예술을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 같지 않다.
: 이집트인들은 예술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있어 아름답다는 미적 태도보다 정치적, 종교적 태도가 더 강조되었던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들은 그다지 철학적인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철학이 종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우리는 종교철학이라 불릴 만한 것도 -겨우 기원전 700년 무렵이 되어서야 '멤피스 신학'이라 불리는 명각이 나온다- 예술철학이라 할 만한 것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와는 달리 희랍인들은 근세에서와 같이 그렇게 명료하진 않지만 이러한 구별에 도달하였다. 그들이 예술을 철학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그 첫단계에 대하여 얼마간 추측은 해 볼 수 있다. 보상케는 <미학사 History of Aesthetic>에서 호머의 시구 하나를 "서구 문학이 지니고 있는 최초의 미적 판단의 하나"로 인용하고 있다. 헤파에스투스Hephaestus가 만든 아킬레스Achilles의 방패에 관하여 호머의 작중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쟁기 뒷편의 대지는 검게 보이는 것이 비록 황금으로 새겨졌으나 정말 쟁기로 간 흙인 듯이 보인다.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 이집트인들과 달리 희랍인들은 예술인 것과 예술이 아닌 것의 구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인용했다. 황금으로 만든 흙을 작품이라고 놀라는 인용구이다.
이것이 진정 미적 판단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미학자들 사이에 흥미있는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 즉, 그것을 단지 정확한 재현, 놀라운 모방력에 대한 찬미로 파악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을 고향땅을 멀리 떠나온 아케아의 전사에게 연상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황금 쟁기를 부각시켜 짙은 빛 토양의 비옥함을 조형적으로 구체화, 강렬화한 것에 대한 순수 미적인 반응으로 파악해야 할지에 관한 논의이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었다!'라는 호머의 감탄은, 서구 세계에서 철학적 사변의 추진력이 처음으로 진지하고 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자마자 최초로 나타난, 미학적 물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언급임에 확실하다.
한편 그것은 현상과 실재, 이미지와 그것이 재현하는 것과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재기한다. 왜냐하면 그림이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이미지들 -꿈의 착각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인식에 대한 우리의 권리 주장의 정당성 여부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의 사상가들이 회화적 재현에 관한 난제를 인식에 관한 난제와 어느 정도까지 관련시켰는지를 정확히 추적할 길은 없지만, 현상과 실재 간의 구분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모방의 본질에 관한 반성이 점점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현상과 실재. 모방은 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가?에 관한 철학적 난제가 발생한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미메시스 mimesis'라는 용어 및 그 자체의 중요한 역사를 가지는 그것의 친족어들은 기원전 5세기에 나타났는데, 여러 다른 소리들의 음악적 모방, 극에서의 사람들의 음성과 행동 모방 그리고 (헤로도투스에서는) 이집트의 사자 목각상 등에 적용되었다. 기원전 6세기 조각에 새겨진 명각에 생략 부호를 암시하는 소유격 형식('of Ajax')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서 그에 앞서 그 동의어가 존재했음이 추론되기는 하지만, 'Eikon(유사성)'도 역시 5세기 이전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 아이스킬루스가 쓴 초기 사티로스 극의 단편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서 합창단은 포세이돈 사원으로 나아가면서 자신들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서 그것의 완벽한 유사성에 경탄하고 있다. 데모크리투스의 유명한 단편에서 "사람은 선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선량한 체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미메이스타이 mimeisthai' 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데모크리투스는 원자들의 특성과 대조되는 부차적 특질의 상대성과 주관성에 관한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을 완성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 선량함과 선량한 체 그것의 구분이 어렴풋이 있었다. 맹아적 형태의 미메시스
희랍문화에서의 제 2의 발전은 플라톤이 최초로 시도한 성숙한 미학적 탐구에 이를 길을 예비해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호머와 해시오드(Hesiod)는 그들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가장 커다란 존경과 경의를 누렸다. 시인의 기능과 선견자 혹은 예언자의 기능은 호머에게는 이미 서로 구별되고 있었으나, 다시 이 둘을 통합하려는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인과 선견자는 둘 다 신탁과도 같이 불가해한 마력을 지닌, 과장된 언어와 감동적이고 현란한 낱말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고대의 음영시인bard의 작품들은 충심에서 어느 한 차원 이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둘은 처음에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작품들은 역사였거나, 혹은 페리클레스이전 시대의 희랍인들이 원하고 필요로 했던 역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두번째 차원에서는 그것들은 도덕적 종교적 덕목, 곧 용기와 경건심의 이미지를 제공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들은 품행을 지도하는 데 적합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 시인과 예언자. 플라톤이 싫어하는 자들인데, 이 둘은 모두 과장된 언어와 수사적인 말을 사용한다. 즉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단어 사용을 꺼렸다고 한다. 오늘날의 글쟁이들이 떠오른다. 시인을 신의 말을 전달하는 자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는데, 여기도 유사한 사고과정이 있었다.
: 시인들과 예언자들의 작품들이 '이미지'를 제공했다고 서술된다. 어떤 상을 제공했을까. '말'을 통해 올바른 삶, 용기와 경건심의 '상'을 전달했다. 이야기꾼의 위치일까? 감상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감상자들에게 올바른 삶의 '상'을 제공하여 품행을 지도했다. 그리고 거기에 '말' 즉 '시'가 적합한 수단이라고 서술한다.
기원전 6~7세기에 자연철학이 생겨나면서 제 3의 해석방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플라톤 이후까지 오래 지속되었다. 고대시인들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하여 숨겨져 있는 심오한 진리를 표현했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만들어 낸 가장 악명높은 인물이 메트로도루스였는데, 그는 <일리아드>에 나오는 인물들에 물질적 의미를 제시했다. -예컨대 아가멤논은 에테르, 아킬레스는 태양, 헬레나는 땅, 데메테르는 강 ... 따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모두의 배후에 있는 것은 전혀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자연철학자들이 물리적 세계에 관한 자신의 자연주의적 성찰을 옹호하기 위해 공인된 음영시인들의 권위를 빌어오고자 했을 것이란 점이다.
: 나의 의문은 이런 점들이다. 시인들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심오한 진리를 표현했다. 그들은 어떻게 남들보다 빠르게 진리를 선취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그것들을 미리 얻어서 전달할 수 있는 권력을 어떻게 가졌는가. 오늘날의 예술가들도 마치 심오한 진리를 선취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것이 올바른가? 올바름을 떠나더라도 사실인가?
: 일리아드를 쓴 시인은 자연의 원리를, 그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여기서는 다소 유치한 일대일 대응되는 상징) 자연의 진리를 나타냈고, 그 권위를 빌려 자연철학자들은 세계의 배후를 주장을 지속했다.
이 모든 발전의 결과로서 호머와 헤시오드는 현인이며 교사로 여겨졌고, 그들의 시적 위대성은 인식적 가치와 결합되었다. 이러한 발전에 관한 반동은 나중에 가서 문학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 것인가에 관한 보다 명확한 개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많은 결실을 낳게 되었던 바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리투스의 통렬한 비평과 함께 시작되었다.
: 시적 위대성은 인식적 가치, 즉 철학적 가치를 얻으며 권위를 얻게 된다. 이후 비평을 통해 문학적으로도..
그러한 비평의 몇몇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서구 문학비평의 최초의 예로 언급된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머와 헤시오드는 창피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들을 인간이 저질렀는데도 그 탓을 죄다 신들에게 돌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들에 관하여 수많은 불법적 행동과 강도 간통 상호기만 따위를 이야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사상노선이었으며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 이들은 <일리아드> 제 20권에 나오는 신들의 전투에 관한 호머의 설명에 특히 반대하였다. 헤라클리투스의 비평은 그 자신의 형이상학에 기초하는데 보다 심오한 진리는 단순히 시인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의 교사는 헤시오드이다. 사람들은 그가 매우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는 빈번히 낮과 밤을 알아내는 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에 꽃피울 제 3의 문제, 즉 예술가의 창조력의 본질과 원천에 관한 약간의 초기적 사유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세계와 세계질서의 기원에 관한 관심은 호머와 헤시오드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희랍 종교의 여러 번형들, 예컨데 오르피즘과 더불어 자라났다. 그리고 창조적 예술가와 신성의 창조자를 정교하게 유비하기에는 분명 너무 이른 시기였으나, 회화와 시가 초자연적인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은 오랜 연원을 가진 것이었다.
: 예술가, 시인을 어떤 창조자와 유사한 무언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예술은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 내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자 정도.
희랍 신학에 따르면, 시와 음악은 신들이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고안하였으며, 그런 다음에 오르페우스, 리누스, 그리고 무사에우스와 같은 선택된 정령들에 의해 사람들에게 가르쳐졌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 데모크리투스는 다소 은유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호머는 신성을 지니고서 다양한 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지만 가장 오랜 지난날의 시인들조차도 자신의 창작물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헤시오드와 호머가 뮤즈신들의 도움을 호소하였을 때에 이들은 꼭 의례적인 인사를 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시인이 말을 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그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헤시오드에게 뮤즈신들이 "우리는 많은 거짓된 것들을 참된 것처럼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고자 할 때는 참된 것을 털어놓는 법도 알고 있다."고 한 말은 흥미롭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시 모두에서 자기의 철학은 어떤 여신에 의해 자신에게 계시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핀다르는 비록 시인의 재능과 영감이 궁극적으로는 신의 선물이지만 작품에 관한 한 시인 자신의 기술과 기능에 책임이 있다는 이론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 제기되는 문제는 신성을 어떻게 인간인 예술가가 가지는가. 그들은 누구길래 신성을 가지고 신의 말을 전하는가. 파르메니데스도 자신의 철학은 자기의 것만은 아니고 여신에 의한 계시라고 고백했다. (한병철..) 근데 핀다르는 시인의 기술을 또 강조했다.
기원전 5세기에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는 인간주의 운동이 있기 전까지 예술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으나, 그 이전의 자연철학의 제전개는 이후의 그러한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관찰 가능한 자연의 법칙 -성장과 계절 변화의 주기적 과정, 물리적 사물에서의 행동의 규칙성-에 관한 관심과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을 설명해 줄 그 저변의 보다 큰 법칙을 발견하려는 충동은 우리가 자연과학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태동하기 위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일찍부터(기원전 532년 무렵에 피타고라스는 그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자연의 설계design와 그것의 기본적 가지성을 수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하나의 중요한 경험적 발견과 몇몇 대담한 물리적, 천문학적 성찰들, 그리고 응용심리학과 윤리학에 대한 관심 등에 의거해서 예술 가운데 하나인 음악에 관한 미학적 이론의 윤곽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 철학. 기원을 찾기. 아르테 찾기. 피타고라스는 수학적 질서를 통해.
그 경험적 발견이 피타고라스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인데, 그것은 팽팽한 현의 길이와 그것이 진동할 때의 음의 높이와의 관계, 다시 말해서 길이의 비율과 그에 상응하는 음정 간의 관계의 발견이었다.-그리하여 1:2는 8도 음정, 2:3은 5도 음정, 3:4는 3도 음정으로 되었다. 질적인 차이가 수학적 비율에 의존하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의해 통제된다는 사상은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일종의 심오한 계시였으며, 옥타바의 음정은 특히 근본적인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홀수와 짝수, 단일성과 이중성의 대립을 내포하면서도그 양자를 완전하게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러한 사상을 일반론으로 확장시켜 물질계의 요소들은 수이거나 수의 모방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의 정교한 천문학적 도식을 만들어 냈는데, 이에 따르면 천체들은 저마다 지구와의 거리에 상응하는 일정한 음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천체의 음악을 사람들은 듣지 못하거나 보통의 방식으로는 들을 수가 없는데, 이는 아마 사람들에게 그 음악에 상응하는 세련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또는 마치 해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파도가 주의를 끌지 못하듯이 그 음악의 일관된 항존성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수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러한 일반적 관심으로부터 시작한 피타고라스학파는 매우 강력한 윤리적 관심에서 개인의 영혼의 '조화'를 강화시키는 문제로 전환하였다. 아리스토크세누스에 의하면 그들은 이러한 치료법으로 의약이 신체에 적응되듯이 영혼을 깨끗이 정화하는 데에 음악을 이용하였다.
: 피타고라스는 세계의 근원을 수적 비례로 보았다. 그것이 세계에 구현되는 방식 중하나가 음악이었다. 수적 비례가 정확한 음정은 아름다운 음정(하모니)으로 발현된다. 이를 넘어 개인의 영혼 조화까지.
이러한 사상의 몇몇이 이후의 중요한 발전의 싹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출발점으로서 플라톤의 미학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초기의 다소 모호하고 빈약한 반성들 이상의 것이 필요하였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와서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증적으로 여러가지 기술과 예술에 종사하면서 보다 자의식적인 이론을 폈던 대가들은 자신의 작업 및 저술활동에 기초가 되는 원리들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다몬은 음악에 관한 일종의 피타고라스적인 논문을 썼는데, 그 가운데에서 그는 특정한 멜로디와 리듬은 특정 유형의 성격ethos과 생활 양식을 모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라이우스가 쓴 음악에 관한 논문도 있다. 소포클레스는 유명한 책 <합창에 관하여>를 썼는데, 그 가운데 단지 몇 개의 단평만이 전해오고 있따.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희곡 속에서 많은 양의 문학비평을 하고 있는데 예컨데 유리피데스의 부당한 플롯이나 인물들, 그의 송시에 붙인 음악, 그리고 시민에 대한 그의 잘못된 영향 등에 대한 비난이 그것이다. 폴리클리투스는 조각의 비례에 관하여 썼으며, 파르하시우스는 회화에 관하여, 아가타르쿠스는 풍경화scene painting에 관하여 그리고 아낙사고라스는 원근법에 대한 글을 썼다. 또 우리가 트라실루스에 의해 작성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카탈로그 복사를 믿는다면,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던 데모크리투스는 <리듬과 화음에 관하여>, <시에 관하여>, <운문, 회화, 노래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리고 긴 제목으로 된 <호머에 관하여 혹은 서사시의 정확한 어법에 관하여, 그리고 그 주석들에 관하여> 등의 책을 썼다. 이러한 저작들은 아마도 미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론-문학론, 음악론, 미술론-의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철학적 미학에서 가장 커다란 수확을 거둘 작품은 이러한 탐구가 어느 정도 완수되어 철학적 일반성과 개별적 예술작품들 간의 간격에 안전한 다리를 놓아주기만 기다려야 했다.
: 개별적 예술 작품에서 보편적 미학으로 진전되고 있는 흐름. 예술이라 부를 만한 것들의 기초 원리를 생각하고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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