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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미학사

2-3 도덕성

be-Seen 2024. 4. 9. 23:29
예술이 모든 교양인의 생활에 침투하여 있고 또 그것을 수행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에게는 특수한 기술적 관심사가 되겠지만, 예술에 관하여 훨씬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사람은 바로 통치자이자 교육자의 역할을 하는 정치가이다. 최고의 기술인 정치를 수행하는 그는 음악이나 회화, 시 등이 사회조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그는 예술이 청중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예술이 예술을 산출하는 전체 문화 속에서 어떤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를, 그리고 예술이 존재할 궁극적인 정당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금 플라톤의 상이한 사상 노선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의 미학사에서 계몽적이고 풍성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노선들도 추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술은 정치가가 알아야 할 덕목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바와 맥락을 함께 한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물음부터 시작해 보자. 미적 향수의 고유한 본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적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독특한 것으로, 그리고 그 개념을 다른 관심사와 지나치게 날카롭게 분리시키고 있는 플라톤을 탓할 수 있겠으나, <필레부스>에서 제시된 방식대로 질문을 해 보자. 거기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화제들 가운데 하나는 쾌의 본질과 선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관한 것이 되고 있다. 

흔히 미,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 그리고 필레부스에는 이러한 쾌와 선의 관계를 말한다. 

이 논의는 상이한 종류의 쾌를 서로 구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참된 쾌'는 색채와 형태의 미, 어떤 향기와 음향, 그리고 앞서 이야기 되었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예컨대 여러분들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꽃나무에서 갑자기 어떤 향기를 맡게 된다. 이는 자발적인 것으로서 말하자면 허기나 갈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또 이는 불필요한 후유증을 남기지도 않는다. 이것은 가려운 데를 긁는 데서 느끼는 쾌와는 달리 순수한 축복이며 공리주의적 의미에서의 순수성이다.

참된 쾌: 형태(시), 향기(후), 음향(청), 기하학적 구성(시). 기하학적 구성과 형태는 유사해 보이기도 함. 

배고파서 냄새를 맡은 건 아니고, 냄새는 그냥 코에 들어온 것이다. 나의 어떠한 상태가 냄새를 맡게 하는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쾌. 필요에 의한 쾌가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적 쾌-이 맥락에서는 음악과 시를 듣거나 아름다운 형태를 볼 때의 쾌를 뜻하는데-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그 등급이 높고 훌륭한 쾌로서 훌륭한 사람, 훌륭한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있다. '음악의 가치는 쾌를 산출하는 힘'이며, 공리주의식으로 쾌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음악도 더욱 더 위대한 것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말한 것이다. 쾌가 올바른 청중의 그것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의 양만으로서는 정당한 시금석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찬양해야 할 것은 "최선의 인간과 높은 교양을 갖춘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다."

쾌에도 등급이 있다. 높은 수준의 쾌는 훌륭한 사람에게 개방된다. 

예술이 쾌를 만든다. 그리고 그 쾌가 많을 수록 예술이 위대하다. 이는 공리주의적 해설. 그러나 이는 정당하지 않다. 그 쾌가 청중에게 어떻게 작용되는지가 중요하다. 예술이 올바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좋은 예술은 올바른 사람에게 들린다. 그리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예술.

불행하게도 이상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술작품들, 특히 비극과 서사시는 인간의 삶과 운명의 모방이면서도,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향수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고도의 정서적 상태 속에 있는, 즉 자신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출하는 인간들을 재현하되 청중들도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재현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지혜롭고 자제하는 인간의 재현은 매우 자극적인 극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증오와 공포, 메데아Medea의 불타는 질투와 가련한 슬픔 따위는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이 아닌 그보다 열등한 부분에게 호소력이 있다. 그러한 극은 "이성을 해치려고 위협하는 요소들을 자극하고 강화한다".

예술 작품 그 중 서사시는 인간의 재현이다. 그것을 '감상'하는 청중들도 작품을 마주하고 겪었던 감정들을 재현한다. 

극에서는 어떤 자극적 감정들이 있고 이는 열등한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다. 신기하네. 이성을 해친다. 감정의 파토스에 휘말리면 이성이 흐려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높은 수준의 예술에서 일으키는 쾌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쾌는 자극적 예술로 이성을 해치는 쾌이다. 이는 '재현'이다. 격렬하게 표출하는 인간들을 재현하는 비극과 서사시를 말한다. 

이리하여 플라톤은 성격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 즉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감정적이고 덜 자제적으로-그들이 울음보를 터뜨리든 무절제한 웃음보를 터뜨리든 간에- 만드는 경향에 대하여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은 "우리의 삶의 선과 행복이 열정을 굴복시키는 데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열정의 성장을 위해 물을 주고 그 열정을 관리하며 고무한다".

예술작품을 보고 웃고 울고... 그거 신중히 고려해라. 

플라톤이 바라본 우리의 삶은 열정<삶의 선과 행복. 그러나 극은 열정을 키운다. 

이것이 <공화국> 제 10권에 나오는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그 유명한 고발의 나머지 반이다.(처음 반은 예술의 허위성에 관한 것이다.) 극시가 향수될 수 있는 것임에도 의문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떤 열정이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열정을 한사코 거부하는 애호가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의 애호는 인격에 그만큼 해로운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시 없이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시 고발 비판.

여기에서 플라톤이 말했던 것은 모든 예술작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들-이것에는 극과 시뿐만 아니라 무용과 노래까지 포함된다-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통상 플라톤이 음악을 말할 때, 그것은 가사나 무용 동작과 결합된 음악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이 귀절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찰을 플라톤이 소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그는 예술에 있을 법한 효과에 관해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성격과 행위에 대한 예술의 영향을 탐고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용을 담는, 인간 군상과 삶의 일부를 재현하는 예술을 비판한다. 그리고 예술->인간의 도덕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법률>의 한 귀절에서는 이러한 관심 변화가 약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서 아테네 이방인은 적당한 음주와 같은 어떤 '해악없는 쾌'는 보다 고차원적인 어떤 기준에 입각해서는 판단될 수 없으며(그것은 어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쾌락주의적 근거 위에서만 동의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유용성이나 진리, 유사성, 해악 등을 낳지 않으며, 오직 매력의 부수적 요소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대상을 쾌의 판단기준에 입각하여 정당하게 판단할 것이다". 

해악없는 쾌. 그것은 쾌락주의의 차원에서만 파악된다. 더 높은 어떤 인간의 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예술을 두 종류로, 즉 좁은 의미에서의 재현적인 것과 비재현적인 것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모방이라면, 어떤 예술도 순전히 그 쾌에 의거해서만 판단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진리의 기준에 의거해서 판단되어야 하며, 이 때의 진리란 현실과의 대응으로서의 진리 뿐 아니라 도덕적 진리까지 포함한다. 

재현적인 것과 비재현적인 것의 구분. 비재현적인 것은 해악없는 쾌와 마찬가지이다. 쾌를 통헤 판단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도덕가의 역할을 일축해 버리면서 (또는 그의 역할을 아직 상정해 놓고 있지 않으면서), 오히려 미를 그 자체만으로 향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귀절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에 관한 플라톤의 지배적인 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야기가 비도덕적 행위를 불러일으킬 만한 어떤 암시도 피할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플라톤은 성장기의 나약한 젊은이의 학습 교과과목을 개관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항상 도덕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예술작품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때, 그리고 그것을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최종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그 전체 사회의 극히 중요한 목적과 가치가 고려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이해하고 있듯이 개인적 향수, 수호자 자신들의 개인적 편애조차도 공동선에 양보해야 한다.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수호자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플라톤의 예술관 : 도덕주의적 색채. 비도덕적인 것을 일으킬 수 있는 예술을 피하라. 

그리고 쾌, 혹은 취향 등보다 예술작품의 평가에 중요한 것은 공동선이다. 

따라서 예술이 시민에게 미치는 선과 악의 영향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게 된다. 플라톤은 그 특유의 역설적 방식으로 예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을 그에 대한 가장 엉뚱한 요구와 결합시켜 놓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의 그의 접근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경험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의 불가피한 영향에 대한 예상을 예술에 관한 일반론에서 끌어내려고 하지 않고, 각기 서로 다른 종류의 예술작품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가에 관한, 믿을 만한 심리학적 정보를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술.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탐구. 

우리가 좋은 경향의 예술 작품과 나쁜 경향의 그것을 구별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 아주 일반적인 말로 이야기한다면, "정신이나 육체의 선함 또는 그것의 이미지에 속하는 형태와 음조는 보편적으로 선한 반면 악함에 속하는 그것들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여기에서 선을 모방하는 일과 선한 행동을 자극하는 일 사이의 매우 중요한 연관을 주목해보라.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 둘은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보다 특이한 것으로서, 우리가 극시를 살펴보면, 불행히도 현존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해악한 경향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은 신이나 영웅들을 비도덕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젊은이들을 사악함을 모방하게끔 유혹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그러한 시의 암송에 참여케 허용한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의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허용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역을 맡는 가련한 성격들의-욕설하거나, 병든, 혹은 허풍떠는 아낙네들, 비겁하게 구는 저급한 유형의 남자들 등등의- 특징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습관화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방책은 젊은 사람들에게 찬양할 만한 일을 하는 고귀한 인물들, 영웅답게 행동하는 영웅들, 신답게 행동하는 신들을 재현하는 극시를 제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을 쓰지 않는 시인은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국경 밖으로 호소되어져야 하며, 그런 일을 할 다른 시인들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상. 그것의 원본인 정신이나 육체. 이것들이 선한 것은 보편적 선함과 반대란다.

극시의 '내용'이 악하다. 비극? 사악함을 감상자들이 모방할 우려.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친다 극은. 개별적 작품을 통한 결론 도출이었다. 

그래서 좋은 내용, 즉 착한 인물, 영우다운 인물, 신다운 신을 재현하는 극시를 만들어야 한다. 

예술이 정당할 때, 선을 행하고 사회의 건전함과 질서에 이바지하는 그것의 힘은 거기에 잠재하고 있는 해악만큼이나 큰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의 화음은 바로 정신의 조화인 미덕을 모방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음악은 듣는 사람의 성격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위험이 있는데, 리디아Lydia와 이오니아Ionia와 같은 몇몇 음조는 어떤 성격적 나약함을 야기하고, 음악의 마력에 지나치게 심취하면 그 결과 성격이 쇠약해지게 된다. 그러나 정당한 종류의 음악과 시, 무용은 성격 교육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음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정당한 예술의 필요성.

화음 - 미덕 모방. 그러나 안 좋은 음악은 덕을 이끌지 못한다. 

예술이 시민의 삶과 교육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예술의 규제는 국가의 중요한 한 기능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이 비극과
음악 작품과 같은 그러한 위험한 것들을 자유롭게 즐기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같다. 예술은 예술가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다. 통치자는 신화의 전설의 제작을 감독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의 구성을 감독하여야 한다. 

예술을 자유롭게 즐겨선 안됐다. 예술가'따위'가 이야기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면 위험이 너무 크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통치자가 만들어야 한다. 

플라톤은 자신이 제안하는 규제의 종류에 대하여 두 가지 확대된 논의를 하였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검열관에게 제출해서 그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더구나 일단 적절한 규칙이 제정되면 혁신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이를 위반할 때는 혹독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플라톤의 수많은 사상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시민들의 예술적 생산과, 그 생산물을 통해 나타나는 시민들의 사상에 대한 권위적인 정부의 통제를 주장하는 이러한 제안만큼 그토록 강력히 공격받으면서 또 그토록 조심스레 옹호되어 온 것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아테네 이방인은 말한다. "내가 통치자라면 시인과 모든 시민들이 이러한 의미로 말하게 하도록 할 것이다. 이 땅의 어떤 사람이라도 사악한 사람들이 즐겁게 살아간다고 하거나 유리하고 수지맞는 일이 정의로운 일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검열! 국가 전체를 위한 검열이다. 플라톤의 사상 오해를 한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많이 사용했겠다. 

귀류법의 도움으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플라톤의 예술검열론은 <공화국> 자체를 포함한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대화의 일부를 제거해버리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는 설사 논박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을 말하도록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플라톤의 지위를 악화시키려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를 그의 최종적 결론으로 삼는다면, 그의 전체 미학관이 다소 불균형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잇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플라톤의 주된 요점이 예술은 그 사회적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다른 쾌 혹은 고통의 원천(술과 흥분제)과 마찬가지로 시민생활의 전체계에서 자신의 합리적인 위치를 찾아내야 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또 플라톤이 예술은 검열되고 제한되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면, 그는(옳든 그르든 간에) 그 자신이 예술의 본질과 선한 삶의 본질로부터 엄격한 논리적 추론을 하여 이러한 입장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검열. 플라톤도 대화의 일부를 검열했을 것이라. 그의 글 역시 다른 이의 대화로 묶여 있더라도 가장 보편적 좋음을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글들을 검열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불균형할 것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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