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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기록
2-2 미 본문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공유하고 있고 또한 자연의 대상을 포함한 다른 대상들도 함께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속성에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것이 곧 미의 속상 to kalon이다. 개개의 사물들 -조각상, 사람들, 말들 등- 은 이 성질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어떤 것들은 그 밖의 것들보다 더 아름답고, 어떤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름다움을 잃어간다. 또 어떤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구체적인 사물들에 있어 그 아름다움이 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모두에 나타나는 하나의 미가 분명히 있다. 이것은 본질적인 미의 형상, 절대미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 미. 변하기도 하고,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 미가 있다.
플라톤이 유일의 초월적 미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유는 정의justice와 같은 다른 형상들의 존재를 믿는 이유와 같다-하지만 <파이드로스>에서는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미에 접근하는 것이 보다 용이하다고 말한다. 형상이란 동일한 용어가 많은 개별자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들이 공유하는 보편자가 존재함이 분명하다. 만약 어떤 대상이 변한다면 이 변화는 자체로서는 변하지 않는 추상적 속성의 상실 또는 획득으로 이해되어진다. 만일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다소 완전하게 미를 구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완벽한 또는 완전한 미를 상정해 볼 수가 있겠으나, 그것은 이 세계의 제반 조건들 하에서는 어떠한 구체적 대상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만일 아름다운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믿지 않고 또 그것의 인식에로 이끌어 줄 안내자를 따를 수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이하게 플라톤이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미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여러 형상들의 보편자가 있음이 분명하다. 장미칼, 식칼, 사시미칼, 커터칼 등 이것들의 보편자는 '칼'이다.
구체적 대상에서는 완전한 미, 완벽한 미, 보편자의 본질 미를 발견할 수 없다. 아름다운 사물이 있고, 이 매개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준다. 도달은 모르겠지만.
우리를 참된 미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안내자는 사실은 우리를 잊었던 고향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상기설anamnesis이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광경 가운데서 미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 가운데 가장 명료한 것을 통하여 이 미를 명료하고 찬연한 것으로 감지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직접 그 형상들을 보았었는데, 이 땅에 태어날 때의 충격으로 그에 대한 기억이 억제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상기될 수 있고, 상기되었을 때 그것은 참지식을 구성한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참된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기의 과정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이라는 것이다.
매개를 통해 고향으로 도달한다. 잊었던 고향. 우리는 본질적 미를 원래 알고 있던 존재라는 뜻인가? 근데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여러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아마 형상에 이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들은 상호보완적일 것이다. 또는 러셀이 얘기한 '기술적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과 '직접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의 구분을 떠올릴 수 있다. 두 단락 앞에서 개관해 본 바와 같은 변증법적 논증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즉 미의 형상은 경험적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 존재하며 정의와 같은 윤리적 형상이나 완전 등식과 같은 수학적 실체와 같은 종류의 존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지식은 여전히 추상적이며 분리된 것이다. 우리가 또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우리의 영혼이 신체 가운데 여전히 있으면서도 다시금 미를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우리 내부의 신적인 사랑eros이 충족될 수 있다.
: 본질적 미는 경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추상적이다. 에로스의 길이 나온다. 미를 직접 파악하기를 원하고 그래야 에로스가 충족된다.
이것은 <향연>의 테마이며, 특히 디오티마 담화의 테마이다. 우리는 신체적 미에서 정신의 미, 제도와 법률 그리고 학문 그 자체의 미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서 마침내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본질적 미'에 도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희미한 형태-남녀의 신체미-에서 미를 사랑하기를 배우지만, 취미를 얻고 그것을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각적 기능을 발달시킴으로 해서 다시금 미 자체를 볼 수 있다는 약속 또는 적어도 희망을 갖고 우리는 보다 고차적이고 나은 미에로 다가갈 수 있다.
: 상승의 과정이다. 신체의 미- 정신의 미 - 제도와 법률의 미 - 그리고 학문 그 자체의 미. 점점 고차적인 미로 나아간다.
아주 이상하게도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미의 재의식 과정에서 예술에게 어떤 역할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예술의 역할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긴 하지만 하는 둥 마는 둥 그만둬 버리기 때문에 <향연>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독자들의 공격을 면치 못하고 있다. 플라톤이 명백히 인정하듯이 멜로디와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고, 이것들 중 높은 수준에 있는 몇몇은 이 땅의 필수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는 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미의 형상을 구현하고 미의 형상에 참여하며,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들에 의존하여 우리가 이 형상에 좀 더 친숙해질 수만 있다면 그만큼 그것들은 우리에게 적어도 형상들 가운데 하나에 관한 지식을 주거나 우리가 그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데도 앞서 인용된 <소피스트>의 귀절에서 플라톤은 예술을 닮은꼴 제작semblance-making의 범주에 넣으면서, 예술가들은 "진실은 제쳐두고 사실은 자기가 만든 상에다가 진정한 비례가 아닌 아름답게 보일 듯한 비례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들이 시각적 효과를 위해 기둥의 현실적 모양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과연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아름다운 것에 차이가 있을까? 모양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왜곡시키는 예술가는 그 이전보다도 플라톤에 의해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각적(또는 청각적) 사물에 미의 형상을 최고도로 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의 모방자인 것이다.
: 예술 멜로디 그림 등도 미에 '참여'한다. 그러나 여전히 플라톤은 예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비판한다.
아름답게 '보이는' 예술품은 '아름다운 것'의 모방자. 일정부분 참여하기는 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가는 만물을 창조한 가장 위대한 창조자-이 세계를 가지런히 해놓은 데미우르고스-에 비견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향연>에는 보다 기발한 일련의 수사학을 구사하면서 우리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될 터무니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전히 그것들은 플라톤의 사상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아가톤은, 미를 산출하는 기술들을 포함하여, 기술을 발명한 것은 사랑eros이었으며, 사실상 "신은 놀라운 사물들에 대한 사랑에서 이 세계를 고안해 내었다"라고 말한다.
: 저자의 입장은,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가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들은 미의 형상을 모방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이 미를 산출하는 기술을 만들었다................
예술이 미를 이 세계로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면 미란 무엇일까? 여기에 플라톤이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던 하나의 물음이 있다. 그의 두 가지 주요한 시도는 <대 히피아스>와 <필레부스>에 담겨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많은 물음들을 답하지 않은 채 남겨두고 있다. 전자에서 그는 주로 미를 정의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분석하면서 그러한 시도들이 왜 성공적이지 못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음색에 있어서 어떤 것은 추한 것으로 헐뜯으면서 다른 것은 아름답다고 칭찬할 때 누군가가 -소크라테스 자신은 또 다른 소크라테스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물었다. "소크라테스여, 어떤 종류의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이 추한지 어떻게 아시오? ... 아름다움이 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겠소?" 여기에서 물음이 야기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한다는 점을 대화자에게 이해시키는 데 몹시 곤란을 겪었다. 다시금 우리는 미의 속성to kalon이 어떤 맥락에서는 '미'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정당한 것 또는 적당한 것에 이르기까지 포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즉, <회상록>에서 크세노 히피아폰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 그 기능을 수행하기에 알맞게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하게 한다. 하지만 <대히피아스>에서, 그리고 <필레부스>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미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아주 가까운 의미로 미를 검토하고 있다. 잘 만들어진 항아리를 아름다운 항아리로 보는 미의 기능적 개념은 거부되고 있다. 결국 헤라클리투스가 말했듯이 가장 아름다운 원숭이일지라도 인간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다. 이런 식으로 미를 정의하려는 다양한 제안들이 제시되고 거부된다. 대화는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다만 아름다움은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 미는 듣고 봄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얼마간의 진실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마도 미는 '유용한 즐거움'일 것이다.
: '미'에 대해서, '미'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화의 과정에서 미는 유용할 것이다. 미는 즐거움이다 등의 정보는 도출된다.
<필레부스>에서 플라톤은 어떤 종류의 사물이 아름다운지를, 즉 아름다운 사물에 공통된, 그리고 그가 생각할 때 그것 없이는 아름다울 수 없는 본질적 속성이 무엇인지를 기꺼이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속성이 구체적인 개별자에 그 형상이 구현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인 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속성이 미를 정의한다거나 미의 구성요소가 된다고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추측컨대 그에게 있어서 미 그 자체는 분석할 수 없는 유일의 단일 속성임을 의미한다.
: 플라톤은 아름다운 것이라면 반드시 가지는 일종의 종차를 말한다. 그러나 그 종차, 본질적인 속성이 '미'와 관련되어 있지 '미'임을 말하지는 않는다. 혹은 미의 구성요소라고도 하지 않는다. '미'는 알 수 없다...
사람에서부터 신전들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아름다운 것들 중 전형적인 보기들을 찾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거슫ㄹ은 부분과 부분의 관계에서 어떤 이상적인 비례를 보여준다. 실제로 사원 전축에 있어 이러한 비례를 보증하기 위하여 정밀한 수학적 측량이 동원된다. 우리는 전체에 동적인 정적과 자기완성을 부여하는 균형 또는 대비를 통하여 부분들이 상호 화답하는 것을 발견한다. 요컨대 우리는 "치수metron와 비례symmetron의 특성은 반드시.. 미와 우수함의 구성요소가 된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필레부스> 끝부분에서 물건들에 등급이 매겨질 때 아름다운 것에는 높은 지위가 부여된다. 소크라테스는 그 첫등급에 "정연한 또는 적절한 것"을, 제 2등급에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것과 완전하고 만족을 주는 것'을 두고 있다. 이렇게 구별을 내리고 있는 귀절은 플라톤의 윤리학적 저작들에서 가장 난해하고 혼란스런 것에 속한다. 또한 그는 이들의 차이점과 관련성을 명료화하는 데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치수와 비례를 미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그리고 미에 본질적인 것-적어도 복합적인 사물에 있어 서는 말이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개별적 아름다움에서 상승 상승 하다가 최종적인 미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로 말하는 것은 수적 비례이다 . 그것들은 미의 우수함의 구성요소. 2등급에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것. 즉 수적으로 비례하는 것들을 두었다. 이건 시각적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음악도 수적 비례.
그러나 단일한 사물-감각 경험의 기초적 성질들-의 미도 있다. "부드럽고 명료한, 일련의 단순음들을 전하는 소리는 어떤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 색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순백은 대단한 폭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모든 흰 것들 가운데 가장 참되고 또한 가장 고상한 것이다." 더구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직선이나 원, 그리고 이들을 이용하여 선반이나 목수의 자, 직각자 등이 만들어 내는 평면과 입체"-또한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아름답다.
전체 사물의 비례, 부분들의 집합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 자체로서, 혹은 단일한 사물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감각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움. 순백이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원과 선, 그것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단순음이나 색조, 직선이나 정다면체, 아가톤이나 알키비아데스의 얼굴과 자태, 희랍의 신전 등, 이 모두에 공통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통일성과 규칙성, 단순성-<티메이우스>의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채용된 '동일한 것'의 원리와 같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것들에 이상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다자보다는 오히려 일자와 연계시켜 그것들의 미를 지지하며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앞서서 비례를 통한 아름다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러면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의 공통은? 통일성과 규칙성과 단순성이다. 일자와 연관된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예술가와 그 창조력을 다시금 고려해 본다면 환상의 제작자로 여겨질 때의 예술가에게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비합리성은 보다 고차원적인 지혜로, 그의 광기는 신적인 영감에 근접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온>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암시는 매우 풍자적인 맥락에 숨겨져 있어서 그 대화만으로 확인하기는 곤란하다. 소크라테스가 이온에게 말하기를 그의 명백한 재능이 곧 '영감'이며 철이 자석에 의해 움직이듯 그가 '신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을 때 소카르테스가 얼마만큼 진지하게 말한 것일까? "모든 훌륭한 서사시인들은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서정시인들이 그러하듯 영감받고 홀린 상태에서 그 모든 훌륭한 시를 내뱉는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변명>에서 "일종의 천재성이자 영감"이라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반어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파이드로스>는 보다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고전적인 영감론의 발원지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해 분류된 이 세번째 종류의 '홀림 또는 광기mania'는 뮤즈여신들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이것은 부드럽고 순결한 영혼에 달라붙어 열렬한 열정적 표현을 부추긴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뮤즈의 광기도 없이 자신의 재능만으로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믿고 시에 입문한다면, 그와 그의 건전한 정신이 제작한 작품은 광기에 의해 제작된 시에 비해 실패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술가가 신적인, 고차원적 지혜를 얻었을 때. 시인들은 기술이 아닌 영감으로부터 서술한다. 일종의 천재성 영감.
정신병자의 실제적인 광기의 발광, 아마도 광상적 발광을 진정으로 영감받은 사람의 외견상의 무모함으로부터 구별해 내기란 이따금 곤란하다. 후자의 경우는 철학자가 참된 미를 보고서 도취되어 비틀거리는 것이 미친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플라톤은 하나의 차이점이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것 같다. 즉 예술가는, 미의 이데아를 지상으로 끌어와서 이 땅에 확립해 보려는 노력이 영감 받은 상태를 필요로 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영감 받은 상태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시적으로나 관례적으로 소위 뮤즈라 불리는 어떤 창조적인 힘에 붙들려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으로 그 미의 이데아의 본질을 통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시인 자신이 (점장이와 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해도,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영감 받은 예술가는 정신병자와 유사하다.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가는 미의 이데아. 그 본질을 통찰한다. 통찰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일까. 그 지식이 전승될 만큼 체계적인가.
여기에는 하나의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영감의 사상과 미에 관한 사상을 조화시키는 문제이다. 척도와 비례를 통한 질서와 대칭의 창조는 냉철하고 합리적인 활동인 것으로 여겨지며-파르테논 신전의 건축가는 분명 자신이 작업 과정의 모든 순간에 있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그 창조가 미덕과 동류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플라톤이 이미 암시하였듯이 이것이 행위의 수단으로 여겨진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시인의 창조적 열광은 그와는 본질에 있어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관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성공적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뮤즈에 의한 미 창조와 합리적이고 지식적인 미덕. 그 두 관점을 맞추어 보기를 시도하는 것 같다.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플라톤의 예술에 관한 저술들 전체에 예술의 두 가지 유형 사이의 근본적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미와 척도는 일반적으로 시각예술의 관련에서 논의된다. 반면 시에 관하여 논할 때 그는 광기와 영감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태도는 상이해진다. 두 번째의 제안은 앞의 것보다는 덜 알려진 것이지만 좀 더 그럴듯하다. 서로 다른 여러 예술들 (말하자면 건축가의 예술로부터 음영시인의 그것에 이르기까지)은 다소 신중한 계획을 필요로 하고, 또 일단 완성된 작품의 아름다움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지만 감각적 형태 속에 미가 포착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창조적 에로스에의 몰입이, 즉 미의 이데아에 대한 영감적 접근이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플라톤의 예술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고,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 시각예술은 척도와 비례. 반면 시는 영감과 광기.
둘째는 감각적 형태가 있다면 그 작품의 분석을 위해서는 합리적 지식적 사고가 필요하다ㅏ. 동시에 그 속에 '미'가 있다면 영감이 내포된다.
이 때문에 예술가는 현세계의 사물들의 행동에 믿을 수 없는 안내자가 된다. 그는 서로 다른 형상Form들 간의 논리적 수학적인 기본적 관계에 대한 합리적 파악은 고사하고 단단한 경험적 주장이나 생산적 재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미에 접근하고 있는 한 그는 지식, 그것도 실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때때로 예술가에게 그 이상의 것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예술에서는 미 그 자체가 '정확성correctness'에 의존하는데, 작곡가가 가사에 맞춰 제대로 곡을 쓰려고 한다면 그 가사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형상Form을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파이아드로스>의 세번째 이야기가 가장 훌륭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만들어내면 항상 지식이 있다. 그것에 맞추어 작품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 노선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즉 모든 예술이 틀렸거나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몇몇 작품은 참되고 몇몇은 참되지 않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변증법적 논증을 담고 있지 않는 한 시 그 자체로서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 진리를 알고 있는 시인이라면 그는 시인 이상이다. 그는 철학자인 것이다. <공화국>에서 수호자들의 초기 교육을 위한 재료를 선택함에 있어서 문제는 참된 시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가 진리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취사선택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술가, 시인에 대한 극찬? 진실, 형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참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적 논증, 진리를 알고 있음이다.
플라톤은 더 나아가 <법률>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예술은 그 정확성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음악은 '모방적imitative'이고 '재현적representative'이며, 따라서 무엇인가에 상응해야 한다. 작곡자나 조각가가 무엇을 모방하려고 했는지를 알기가 곤란할 때가 가끔 있다. 아테네 이방인(즉 소크라테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작곡가들이 가사를 음악에서 분리시키고 칠현금이나 플룻만을 연주할 때, "이 가사 없는 리듬과 화음을 통하여 과연 의도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즉 그 연주가 어떤 가치 있는 원형을 재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난점은 어떤 조잡하고 무미건조한 진행과정의 결과로 우연히 주목받게 된 것으로서, 음악이 가사로부터 충분히 해방된 이후에 와서 매우 중요한 미학상의 문제가 되었다. 즉 순수음악이 무엇을 모방하는가를 논하고 그 성패를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이는 그것이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유능한 판단자라면 그는 적어도 어떤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판단자는 "우선 원형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 그다음에는 그 모사물의 정확성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세 번째로 그 모사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우수성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예술은 본질적 이데아에 상응하고 모방한다. 가사가 있는 음악. 그리고 거기서부터 만들어진 음악은 그 가사의 '의도' 혹은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음악이다. 근데 소위 순수음악이라 불리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모방물이 없기에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의도가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지속적인 말은 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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